못다 핀 꽃 한 송이

김순자 여사 인터뷰

일시 : 2023년 6월 28일 오후2시

장소 : 동문장학회사무실 

배석 : 이건직 이사장 / 강희구 총무이사 / 유형용 홍보이사

 

이건직

지난 6월20일에 여사님을 뵙고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저희가 알고 있었던 박선주 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단편적이고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동문들은 박선주 선배님 장례식 때 들어왔던 부의금 중에 2천만 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하셨던 김순자 여사님과 가족들의 결단에 관한 이야기 외에는 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잘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교문 앞에 세워져 있는 ‘不屈의 精神(불굴의 정신)’ 이라고 쓰여진 자연석 조형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사실을 학인하고자 이렇게 여사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42년을 교직에 몸담으시면서 박선주 선배님의 삶을 실제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계셨다는 짐작을 했습니다.

 

김순자

1957년에 초임 교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박교장보다 몇 년 선배이지요.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겠죠. 첫 부임지가 백령도 중학교였답니다. 백령도에서 여선생을 구경할 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강희구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접경지역으로 가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김순자

미군들이 쓰던 철사와 비닐로 창문을 만들어서 쓰고 미군들이 연료를 줘서 겨울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10개월 만에 아버님이 백령도에 들어오셔서 데리고 나오셨어요. 내가 나온 뒤로 3년 후에 고등학교가 생겼더군요.그 다음에 남한강 부근에 있는 여주여고에서 2년 근무했어요. 그때만 해도 인천이 경기도였습니다. 그리고 1961년에 인천여고로 발령을 받아서 12년을 근무했지요. 거기서 아이들을 넷 낳았습니다. 부천에서 3년 있다가 다시 인천여고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부평여고 교감을 거쳐서 다시 인천여고로 돌아와서 근무했습니다.

 

강희구

인천여고하고 인연이 많으십니다.

 

김순자

그렇지요. 18년을 근무했어요. 인천여고 동문들은 내가 인천여고 동문인 줄 알아요. 인천여고 동문들은 홈커밍데이를 3년마다 하거든요. 아주 철저하게 행사를 합니다. 그때마다 저를 초대하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하기도 하지요.

 

이건직

박선주 선배님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김순자

제가 여주여고에 근무할 때 조규영 교장 선생님이 계셨어요. 1년 반을 같이 있었지요. 그분이 안성으로 가셨는데 2개월 정도 후에 전화가 왔어요. 내일 크리스마스인데 자신의 생일이라고 하면서 집으로 초대를 하셨어요. 그래서 갔더니 어느 선생님을 오라고 하셨는데 그 분이 박교장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공무원들은 모두 국민복을 입었거든요. 까만 국민복을 입고 박교장이 나타났어요. 그런 인연으로 1961년에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유형용

첫인상이 어떠셨습니까?

 

김순자

학생들이나 선생님들도 참 엄하고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으로 보더라고요. 여기 공고 앞에 다방이 있었어요. 거기에는 우수 학생들을 유치하려는 각 기업 담당자들이 많이 왔고 실업담당 선생님들이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거든요.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다방 근처에만 와도 선생님들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제가 한 번 다방에 간적이 있었는데 거기 주인이 그러더군요. ‘박교장하고 사는 사모님은 얼마나 힘들까?’ 하고 생각했다고 하데요. 하지만 겉보기에는 강해보여도 마음은 매우 유한 분이라고 말해주었어요. 저 불굴의 정신에도 그것이 담겨있어요. 따뜻한 마음, 따뜻한 정을 품고 살면서 정의를 주장하는 정의파에요. 남이 얘기 못하는 것도 대표로 나서서 얘기하는 정의파죠. 얼마나 강인한지 뭘 한 번 하겠다 그러면 그것을 꼭 이루고야 마는 도전정신이 매우 강했지요. 도중하차라는 걸 모르셨던 분이에요.

 

이건직

저는 불굴의 정신 조형물을 보면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선배님께서 남다른 가치관을 갖고 계셨기에 설치가 가능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순자

당시 사회적 환경이 매우 열악했잖아요? 교장으로서 학생들을 바라볼 때 그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메시지가 많았을 텐데 그중에 하나였겠지요.고3 때 부친이 작고하셨는데 본가가 있는 당진까지 배를 타고 가야했는데 너무 추워서 뱃길이 험해지는 바람에 장례에 참석이 늦어졌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까운 친척이 혼자 계시는 어머니에게 집문서를 달라고 해서 들고 나가 유용해 버리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더 힘들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서울공대를 가려고 했었는데 돈이 없으니까 서울대학교 가운데 등록금이 제일 싼 사범대학을 가게 되었어요.

 

강희구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신거네요?

 

김순자

네, 물리과 나왔어요. 큰댁 형님하고 나이가 한 살 차이였는데 같은 학년으로 같은 학교에 다녔어요. 그분은 법무사로 일하시면서 지금도 생존해 계세요. 글씨를 참 잘 쓰셨어요. 노트 필기를 해놓은 걸 보면 정말 감탄스러웠다고 해요. 동생은 맨날 나가 놀고...

 

이건직

동생이라 하면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김순자

박교장이죠. 노는 걸 좋아했어요. 아침잠이 없어요. 새벽 4시면 일어나 운동을 하러 나가곤 했어요. 처음에는 체육선생인 줄 알았어요. 결혼할 당시에 체격이 딱 벌어져서 우람했어요.

살아계실 때 추원실 동문을 비롯해서 스물 몇 명이 양지회라는 이름으로 연말이면 동부인해서 만나곤 했던 생각이 나네요.

 

이건직

추원실 선배님도 12회 졸업생이시죠.

 

김순자

그 당시에는 인천고등학교하고 인천기계공고하고 대립이 대단했어요. 인고에서는 이관식 교장이라고 있었어요. 우리하고 같은 연배인데 인천여고 교감도 하시고 경기도에서 퇴직하고 돌아가셨던 분이죠. 인고의 대장이 그분이고 공고의 대장은 박선주라고 우리 젊었을 때는 대단했어요.

 

이건직

슬하에 자녀를 어떻게 두셨습니까?

 

김순자

삼녀일남으로 사 남매를 두었어요. 막내가 아들인데 올해 쉰다섯이네요. 지금 함께 살고 있어요.

 

이건직

박선배님이 독자이셨나요?

 

김순자

네, 그래서 양지회 멤버들과 정말 가족같이 지내셨어요. 도원동 공설운동장 근처에 아지트가 있었어요.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데 양지회 멤버의 사무실이 거기 있었거든요.

 

이건직

모교 교장 재임 중에 동기분들과 교류를 통해 장학회의 필요성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93년에 우광균(기9) 동문을 비롯해서 홍영기(화10) 추원실(기12) 박선주(기12) 동문 등이 장학회의 첫 삽을 뜨셨다고 돼있습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당시에 재정적으로 어려웠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환경이 열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선주 선배님이 교장으로 계시면서 구심점 역할을 하셨을 걸로 여겨집니다.

 

김순자

네, 박교장은 사고방식이 고리타분하지 않고 앞서가고자 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요. 돌아가시기 전에 박씨 문중 회장을 맡으면서 가족묘를 납골묘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나중에 큰댁의 박성복 형님이 가족 납골당을 지었어요. 그래서 장례를 치를 때는 천안시청에 근무하던 박성복 형님의 동생이 천안에 있는 풍산공원묘지에 안장할 수 있도록 절차를 밟아주었어요.

 

유형용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순자

사인은 심장마비로 나왔어요. 박교장이 중고등학교 교장단 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매년 학교 운영을 하면 위로 겸 연수회를 개학 일주일 전 쯤 해서 교장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모임을 갖곤 했어요. 그때는 장소가 수안보였어요. 저녁 식사를 하고 다음 날 아침 여교장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남자들이 오더니 나더러 빨리 오라고 그러더군요. 그 빨리 나오라는 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빨리’라는 소리를 지금도 못 들어요. 그래서 가보니까 교육감님, 국장님, 과장님 다 현관에 앉아 계신데 제 시선을 피하시더라고요. 당시에 박교장이 교육감에 나오니 안 나오니 얘기가 있던 터라 저러시나보다 하고 5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니까 교장들이 앞을 내다볼 수 없이 많이 서있었어요. 버스 3대가 꽉 차게 갔었거든요. 그때까지도 저는 그걸 몰랐어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 방에 가보니까 빨간 딱지로 출입금지라고 돼 있더군요. 그걸 떼어내고 들어갔더니 흰 천으로 덮어놨더라고요. 벌써 27년 전 이야기네요.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은행에 가서 돈을 찾으려고 했더니 당시 제물포 고등학교 서무과장이 가만히 계시라고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시면서 정말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셨어요. 인하대학병원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이상하게 그때 거기 특실이 다 비어있어서 우리가 다 쓸 수 있었어요. 정말 많은 분들이 조문을 오셨지요. 당시에 제물포고등학교 야구부를 없애자는 분위기였거든요. 박교장이 교장으로 가서 야구부에 심혈을 기울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야구부 아이들이 조화를 가득 따서 관에다가 웅장하게 장식들 했었어요.

 

이건직

참 안타깝습니다. 많이 놀라시고 힘드셨을 걸로 생각되는데 잘 이겨내셨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직접 관계된 분들 외에는 동문들도 잘 몰랐던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여사님께서 직접 말씀을 듣게 돼서 다행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교육감으로 영전되시기 직전이라 더욱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우광균(기9) 선배님께서 일전에 말씀하시길 박선주 선배님이 교육감이 될 뻔 했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여사님께서 해주시네요. 선배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많은 애정을 갖고 지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김순자

당시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았잖아요? 학교 근처에 2층으로 된 집이 우리 집이었어요. 예전에는 담장 옆에 장독대를 높이 만들었잖아요? 시어머니께서. “참 이상하다. 고추장 된장 간장이 어쩌면 이렇게 푹푹 줄어드는지 모르겠다.” 이러시는 겁니다. 그래도 뭐 그런가보다 그랬는데 나중에 졸업생들이 취직했다고 인사를 와서 하는 말이 “사모님, 여기 고추장 된장 많이 없어졌죠? 저희들이 자취하면서 몰래 퍼다 먹었습니다.” 하더군요. 교장 선생님 집이라는 걸 알고 맘 편하게 가져다 먹었대요.

 

이건직

선배님께서는 교직이 아니고 엔지니어를 하셨어도 대단한 일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김순자

교육청에 근무하실 때 실업교육과를 처음 만드신 분이에요. 말하자면 실업교육과를 창설하신거죠. 그리고는 실업교육과 담당관을 일했어요. 그 다음에는 과학기술과를 창설하셨어요.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특기인 셈이죠.

 

이건직

참 대단하셨네요. 얼핏 들었는데 현 교장인 강선구(기37) 교장의 주례를 봐주시기도 하는 등 학교 행정 뿐 아니라 대외적인 활동을 왕성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밖에 관심을 갖고 계셨던 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순자

당시에 전주고등학교는 판검사를 비롯해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만한 동문들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교정에 세웠어요. 그것을 보시고 우리 학교도 그와 같은 일을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진학반을 만들었어요. 교육청에서는 본연의 목표대로 해야될 것 아닌가 하면서 말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학반 아이들 중에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리고 국내 대회 뿐 아니라 국제 기술 경기 대회에 심사위원을 많이 역임하셨어요. 그래서 작고하신지 일주년이 됐을 때 관련된 분들이 나서서 기념비를 해주셨어요. 천안에 가면 묘비 뒤에 그 내용을 명문화해서 기록해주셨어요.

 

이건직

그 작업을 주관하신 분들이 동문들이었습니까? 아니면 교육당국이었습니까?

 

김순자

교육계가 주도했고요 동문들도 몇 분 성함이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유형용

타계하시기 전에 추진하고 있었다거나 계획을 하고 있었던 일은 없었습니까?

 

김순자

교육감을 하고자 하셨죠. 저는 퇴직하고 전국 여행이나 다니자고 했었는데 박교장은 ‘내가 정통 사대 출신이고 아래서부터 국장까지 다 거쳤으니까 한 번 해보겠노라.’ 이러셨어요. 제가 말리려고 했는데 교장단 연수 모임 가기 4~5일 전에 교육청 과장님 한 분하고 교육장 한 분하고 교육감님하고 세 분이서 저녁이나 먹자고 불러서 나갔는데 거기서 그 얘기가 나왔어요. 그 중에 교육장 하셨던 분이 다른 분에게 양보하라고 권면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 자리에서 완강하게 거절을 하고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얼굴이 아주 파래졌더라고요. “내가 칼을 뽑았다.” 고 하면서 들어오셨어요. 그리고 3일 후에 돌아가신 겁니다. 그런 까닭에 바깥에서는 잡음이 많았어요. 하여간 제 생각에는 그런 일이 원인이 돼서 정신적으로 압박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혈압도 높아지고 하니 몸에 무리가 갔던 것이 아닌가 해요. 교육계에서는 말이 많았어요. 박교장이 작고하고 6개월 후에 교육감 선거가 있었어요.

 

유형용

박 선배님께서 현직에 계실 때 학생들에게 어떤 마음을 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순자

애들하고 상담을 많이 하셨어요. 아이들을 집에 오게 해서 같이 밥을 먹기도 했지요. 그런 방식으로 아이들을 격려하고 소통하고자 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참 많았잖아요? 그런 마음을 가족들에게 숨기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장례를 치르고 가족회의를 했어요. 부의금이 4,600만 원이 들어왔거든요. 이것을 아버지의 신념과 유지를 받들 수 있도록 사용하자고 뜻을 모았던 겁니다. 그래서 모교가 우선이고 교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던 제물포고등학교와 장학회 이사이셨던 당진중학교 장학회 그리고 장례를 집례해주신 저희가 다니던 교회 등에 전액을 나눠서 전달했어요. 그런데 이 일이 여기저기 알려져서 일간지마다 기사가 나기도 했지요. 제물포 고등학교에서는 장례를 학교장으로 치러주시면서 장례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내용을 사진 찍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서 가져왔더군요. 거기에는 신문에 난 기사 스크랩까지 포함돼 있었는데 그것을 오늘 가지고 왔습니다. 덧붙이자면 교육 당국에서 순직자로 인정하고 등록을 해주셔서 지금가지 저희들은 국가보훈대상자로 돼 있습니다.

 


이건직

아주 귀한 자료입니다. 저희는 처음 보는 자료입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인터뷰를 하지 않았더라면 동문들에게 알려질 수 없는 내용들이네요.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듬어서 많은 동문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어떻게 소일하고 계십니까?

 

김순자

나이를 많이 먹으니까 봉사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궁리 끝에 하모니카를 하면 어떨까 해서 몇 년을 배웠어요. 그랬더니 주간보호센터 치매 환자들을 위해 봉사가 되더군요. 요양원이나 주간보호센터에 가서 연주를 하고 그들이 좋아해주면 오히려 내가 기를 받고 오게 됩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방역 때문에 그것이 중단됐어요. 그래서 몇 년을 쉬니까 더 이상 봉사를 다닐 형편이 안 되네요.

 

유형용

선배님과 결혼생활 속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순자

그 사람은 바깥에서는 매우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집에서는 참 부드러웠어요. 집에서 술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술자리에 합석했던 사람들 전부 집에 데려다 주고 집에 오곤 했어요. 신혼여행 갔다 오니까 신발장에 시어머니 신발이 놓여 있었어요. 거기다가 결혼할 때가 다 된 시누이가 있었지요. 저는 신혼이라고는 단 하루도 없었어요. 웃음

 

유형용

고생을 많이 하셨겠습니다.

 

김순자

고생은 어머니가 하셨어요. 저도 출근을 해야 했으니까 아이들을 다 길러주셨지요. 그리고 우리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어요. 당진 분들 만나면 며느리가 아들보다 호봉이 더 많다고 자랑하셨어요. 그러시면서 며느리가 교육자이기 때문에 만만하게 볼 수가 없으니 불편하셨겠지요.

 

이건직

네, 며느리가 아들보다 돈도 더 많이 받는 교육자라면 어떤 시어머니일지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겠습니다. 그런 상황을 잘 아시고 여사님께서 지혜롭게 섬기셨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김순자

아이들 업어 키우시면서 한 순간도 땅에 내려놓지를 않으셨어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셨겠어요? 교직 생활 42년을 하면서 다른 여교사들과 달리 참 편안하게 했고 교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시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었어요. 고3 담임하면서 11시까지 자율학습 관리를 할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이 다 평가를 받지 않았겠어요? 제가 친정에 딸이 다섯이에요. 제가 둘째 딸이죠.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서 친정에 가게 되면 나를 혼자 보낸 적이 없어요. 다른 형제들은 가끔 혼자 오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친정아버지가 약주를 좋아해서 시작하면 다른 사위들은 도중에 도망을 가거나 옆으로 눕거나 딴 짓도 하는데 박교장은 아버지가 그만 먹자고 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어요. 아버지가 둘째 사위를 참 좋아하셔서 유언을 남기셨어요.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이건직

부부 간에 신뢰와 애정이 크셨던 것 같습니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두 분이나 모시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잖습니까?

 

김순자

박교장이 안성 죽산학교에 있을 때 사진을 보면 박교장 옆에 예쁜 여자가 서있어요. 박교장 말로는 그 여자가 자기를 굉장히 좋아했대요. 그런데 유심히 지켜보니까 저 사람은 절대로 시어머니를 모실 것 같지를 않더래요. 그런 차에 나를 보고는 오케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고는 술만 취하면 ‘나는 바보다. 나는 바보다.’ 그랬어요. 웃음^^

 

유형용

그분하고 연을 맺으셨으면 아마 평생 고생하셨을 겁니다. 웃음 ^^  제가 재학중일 때 박선배님이 교감이셨고 교장이 윤석제 선생님이셨어요. 당시를 돌아보시면 기억나는 일 있으십니까?

 

김순자

네, 정월 초하루에 우리 집 이층에서 명절놀이를 하곤 했어요. 그때 내가 우리 집 양반에게 그랬어요. “윤 교장 선생님은 참 멋쟁이야.” 왜냐하면 아침에 청소를 하러 올라가서 방석을 정리하면 그 밑에 꼭 돈이 있어요. 다른 자리에는 없는데 윤 교장 선생님 자리에만 돈이 있는 거지요. 새벽 4시쯤 되면 출출하니까 국수를 끓여내라고 해서 잡수시고 가셨어요.

 

유형용

정말 근사한 장면이 연상이 됩니다. 말하자면 폐를 끼친 것에 대한 성의 표시를 그런 방법으로 하신 거네요. 직접 주거니 받거니 하면 소란스러울 것이니 슬쩍 놓고 가시는 마음이 참 멋스럽게 느껴집니다.

 

이건직

저희가 너무 긴 시간 여사님을 힘드시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선주 선배님께서 첫 삽을 떠주신 동문장학회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장을 거듭한 끝에 든든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최근 금융환경이 좋아지고 목적기부금이 증가하는 덕에 장학금 지급확대를 포함해서 학생들을 해외 견학시키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정리해서 제도화 하고 매뉴얼화 해서 안정적으로 운영하고자 합니다. 오늘 장학회를 방문해주시고 역사관을 둘러보시면서 어떤 느낌이셨는지 말씀을 정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순자

역사관에 역대 교장 선생님들 사진을 보니까 인연이 있었던 눈에 익은 분들이 많네요. 같은 시대에 교직 생활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박교장은 어디든지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더욱 많은 분들을 알 수 있기도 했었어요. 인천여고에서도 무슨 일이 있으면 날 불러요. 물어보고 확인 것이 있다고. 오늘 이사장님 덕분에 장학회에 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고생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여전히 우리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어린 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서로 힘을 모아서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건직

오늘 김순자 여사님을 다시 뵈면서 차분하고 조용하게 옛일을 회상해주시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박선배님의 인간적인 면모에서부터 가슴 아팠던 이야기, 그리고 감동적인 이야기 까지 직접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잘 정리해서 기록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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